현암 이종덕(玄岩 李種德, 1350~138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현암(玄岩), 삼당(三堂)이다.
정읍감무를 지낸 자성(自成)의 증손으로, 도첨의찬성 우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右文館大提學)을 지낸 곡(穀)의 손자이고, 시중(侍中) 색(穡)의 첫째 아들이며, 권중달(權仲達)의 외손자로,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유혜손(柳惠孫)의 사위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왕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1373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밀직(知密直)으로서 문하평리 이구(李玖)와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 이성계파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켜 귀양 보내고, 최영(崔塋)장군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 부당함을 꾸짖고 반대하다가 이성계파의 노여움을 받고 투옥되어 장형(杖刑)으로 죽매를 맞고 죽었다.
1392년 4월 동생 종학(種學)이 청주옥에서 방면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고려의 유신(遺臣)56명을 외방에 축출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조처로 원방에 유형 되었다.
그는 효행이 돈독하고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얼음속 생선이 부엌에 들어오고 겨울 죽국이 밭에서 났는데 이는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해서 그랬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한다. 그의 부친인 색(穡)의 "얼음속 생선과 겨울 죽국은 하늘이 알아준 것"이란 시 구절에서 갸륵한 효성을 엿볼 수 있으며, 부친이 병들었을 땐 벼슬도 마다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병시중을 들었다.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고, 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총명함이 남에 월등하여 착한 일을 즐겨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이 또한 특별히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슬하에 4남을 두었으며, 충청남도 서천군 영모리에 위치한 문헌서원에 추배되었고 그의 효성을 추도한 효행비각이 세워졌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