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이종학(麟齋 李鍾學, 1361~1392)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곡(穀)의 손자이며, 색(穡)의 둘째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색이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부친인 색(穡목)이 탄핵을 받아 1390년 12월 1일 관직에서 쫓겨날 때 더불어 폄출(貶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왕방, 조반 등의 음모로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모두 청주의 옥에 갇혔다. 이 때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청주성 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백성들의 집도 다 떠내려가는 홍수가 났다. 고을 사람들은 하늘의 감응이라 말하고 태조도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색(李穡), 이종학(李鍾學),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이 사면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원지로 유배되었다.
이런 내용은 양촌 권근이 지은 『압각수시문』에 내용이 들어있고, 『압각수』는 바로 청주 현 중앙공원내에 있는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의 별명이기도 하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해 조선이 들어서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가 판관으로 있어서 그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되었다.
문장에 이름이 높았고 사실에 밝았으며 겨우 29세의 나이에 재상반열에 오르는 등 일찍부터 조부인 곡(穀)과 부친인 색(穡)의 유풍을 갖췄던 비범한 인물로 성격은 강직하고 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