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공 이종선(良景 李種善, 1368 ~ 143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부(慶夫).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곡(穀)이고, 아버지는 색(穡)이며,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1382년(우왕 8) 15세 때 문과에 급제해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해 효자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외직으로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일당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떨어져 멀리 귀양갔다.
1396년 병조참의을 거쳐 1409년(태종 9) 좌우사간대부가 되었을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해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穡)의 비명 문제로 동래진으로 귀양갔다.
그 뒤 호조참의·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17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구암사와의 노비속공 문제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18(세종 즉위년) 한성부윤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 호부(虎符)를 인수인계 하는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로서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10여년이 지난 1438년 중추원사로 재등용 되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나라에서 조상(弔喪)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려 주고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하였는데, 양아라는 뜻은 성품이 온량하여 화락하라는 것이고, 경이라는 뜻은 행실을 의리로서 행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