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공 이맹균(文惠 李孟畇, 1371~144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 할아버지는 색(穡)이며, 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종덕(種德)이다.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385년(우왕 11)에 문과에 합격, 예(例)대로 성균 직학(成均直學)에 보임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사재 소감(司宰少監)으로 되었고, 다시 내서 사인(內書舍人)으로 전임되었다가, 외임(外任)으로 나가서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되었으며, 고만(考滿)이 되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제수되었고, 얼마 못되어 사헌부 집의(執義)로 되었으나 사송(司訟)을 지체한 죄로 원주(原州)로 귀양갔다.


사면이 되어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로 되었고, 신묘년에 소환(召還)되어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배임(拜任)되었다가 곧 판승문원사로 승진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보되었으나 상서(上書)하여 해면되기를 청하였는데, 드디어 좌사간(左司諫)으로 제수되었고, 을미년 겨울에 예조 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여러번 자리를 옮겨 경승부윤(敬承府尹)으로 되었다. 무술년에 다시 외임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돌아와 한성부윤(漢城府尹)에 배수(拜授)되었다.


1421년(세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 참판으로 전보되었으며, 다음해에 공조 판서로 배임되었다가 곧 예조판서로 옮겼다. 1425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여러 번 이조와 병조판서를 지냈고, 1427년 좌빈객(左賓客)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그 뒤 의정부참찬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배임되었고, 무신년에 다시 이조판서로 제수되었다.

1429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와서 의정부참찬이 된 뒤 성균관대사성·판한성부사·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1437년 예문관대제학 겸 판이조사(藝文館大提學兼判吏曹事)가 되니 판이조사를 겸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지중추원사 겸 판이조사(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로 전보되었고, 겨울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는데 판이조사는 그대로 겸했고, 기미년에 좌찬성으로 승진되었다.

1440년 부인 이씨가 심한 질투로 종을 죽인 사건으로 파면되어 황해도 우봉현(牛峰縣)으로 쫓겨났다가, 방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開城府)에서 70세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가 부인에게 압제(壓制)를 받아 늙어서 죽음도 편하게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는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일찍부터 가업(家業)을 이어서 시문(詩文)이 전아(典雅)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부드러운 자질로써 백성을 자애함이 혜(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