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 1417~1456)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색(穡)의 증손이며, 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손자이고, 계주(季疇)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사(賞賜)를 받았다. 1447년 9월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하여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그는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하였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고 있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되는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써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의 총명을 모독하였으나 한 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주춧돌 질)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 홍모(鴻毛: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 현릉(顯陵: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조)도 자결하였는데, 단종복위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이 그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하여 단종복위사건의 주도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는데,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분묘(墳墓)는 현재까지 노량진(鷺梁津)의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 안에 동시처형(同時處刑)된 네 분과 함께<이씨지묘(李氏之墓)>란 묘표(墓表) 뒤에 설치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선생이 처형된 지 3일째 되는 날 밤중에 몰래 형장(刑場)으로 잠입하여 아직도 장대 끝에 매달려 있던 충신들의 수급(首級)만을 고이 수습하여 배를 타고 노량진 언덕으로 건너와서 암장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처음 의열(義烈)로 했다가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改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