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애 이자 (陰崖 李, 1480∼15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아래에서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世上을 보는 눈은 날카로웠으나 경솔히 행동하지 않았고 燕山君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君主를 탓하는 선비들을 나무라고 위로하였으며 學問이 깊어서 그를 따르는 者가 많으므로 그는 기뻐하면서도 남에게는 小人이라고 겸손했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조광조가 주장했던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기묘명현이다. 하지만 그는 급진적 개혁만이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신진 사림들과는 달리 개혁의 속도를 늦추어 개혁에 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조광조에게는 부족했던 배려와 포용을 알았던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기에 기묘사화 이후에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십청헌 김세필(金世弼), 탄수 이연경(李延慶), 준암 이약빙(李若氷) 등 당시 명망있는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탄수 이연경, 십청헌 김세필, 소재 노수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살아서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