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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영정
  • < 이색 영정 >보물 제 1215호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影幀)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本)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가 서천 영모영당(永慕影堂)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누산영당(樓山影堂))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보관과정에서 초(초)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해 효종(孝宗) 5년(年)(1654) 후손들이 2본(本)을 모사하여 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예산(禮山) 누산영당소장본(樓山影堂所藏本)은 1654년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1601~?)와 유명한 화사(畵士)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서천군청 홈페이지
가정목은선생문집판
  • < 가정목은선생문집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77호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李穀,1298∼1351)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한산군으로 봉해졌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가정집은 목은선생이 생전(1364년, 공민13)에 20권으로 편찬하였으나 소실되었다.
  • 내용초간본은 아들 색(穡)이 편집하고,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금산에서 1364년(공민왕 14)에 간행하였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사이에 병화로 소실되자, 1422년(세종 4)에 그의 후손인 종선(種善)이 강원도관찰사 유사눌(柳思訥)로 하여금 중간하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판본이 소실되었고 전해지는 책이 희귀하게 되자, 후손 기조(基祚)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구본(舊本)을 얻고 산질된 시편을 보결해서, 1635년(인조 13) 대구에서 세 번째로 중간하였다.
    이 3간본 『가정선생문집』 20권은 3책 혹은 4책으로 분책되어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그러나 3간본은 전질이 못되고 빠진 것이 많아, 후손 태연(泰淵)이 전라도관찰사로 갔을 때에 얻은 완본(完本)을 대본으로 하여, 1662년(헌종 3) 전주에서 4책 20권으로 된 『가정집』을 간행한 것이 4간본이다. 권1에 수록된 「죽부인전(竹夫人傳)」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절개 있는 부인에 비유하여 쓴 가전체작품으로,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 등과 함께 우리나라 소설문학의 형성 및 발달과정을 살피는 데 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1939년에 예산에서 중간하였는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73년에는 4간본을 대본으로 하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목은집(牧隱集)』ㆍ『인재집(麟齋集)』을 합본하여 『고려명현집』으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있으며,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한국 문화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서천군청 홈페이지
이색신도비
  • < 이색신도비 >문화재자료 제 127호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석에 기록하여 묘 남동쪽에 세우는 것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색(1318-1396)은 고려후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는 전제으 lrogur,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등 여러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원, 명교체기에서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고려후기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여강지역으로 가던 중 생을 마치었다.
  • 이색 신도비는 1433년(세종15)에 호정 하륜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공부가 쓴 비를 세웠다가 1433년 우암 송시열이 <목은선생 비음기>를 쓰고 전액을 <유명조선국원선수......>에서 <고려문하시중 목은선생 이공 신도비명>으로 다시 새겨 세웠다. 전액은 문곡 김수항이 쓰고 글씨는 12대손 이수경이 썼다. 문헌서원의 사액 이후 가정과 목은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새롭게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우암 송시열은 목은의 행적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역설하였다. 즉 우암 송시열은 목은선생 신도비음기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鄭道傳)이 목은 선생의 죄를 의논한데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서천군청 홈페이지
이색선생묘일원
  • < 이색선생묘일원 >도지정 기념물 제84호
    이색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묘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 한다. 묘앞에는 11대손이 1694년(숙종 20)에 세운 여러 석물이 있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 무덤 앞에는 망주석·문인석, 마석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서있다. 비는 단순한 형태이며 앞면에 ‘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서천군청 홈페이지